글쓰기/영화

[영화] 윤희에게

집순집순 2020. 3. 1. 23:46

 

 

  "윤희에게. 잘 지내니?"로 시작되는 편지 한 통이 한 아이의 엄마이자 고독한 중년 여성의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다. 퀴어 영화인 줄 전혀 모르고 봤던 터라 조금은 당황했지만 어느 순간 빠져들었고 윤희와 쥰의 찬란히 빛나던 시절이 궁금해졌다. 교복을 입었을 그 어린 시절 행복했던 둘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영화는 끝끝내 보여주진 않았다. 그래서 더 애잔했고 마치 빛나던 과거로 절대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듯했다.

 

 

  러브레터의 퀴어 버전 영화라는 수식이 어울리는 영화이다. 첫사랑의 아련함과 그리움, 성소수자로서 가족들에게까지 인정받지 못하고, 억압받고, 늘 외로웠을 주인공의 쓸쓸함까지 더해져 더욱 가슴이 저려왔다. 가장 가슴 먹먹했던 장면은 수십 년 만에 우연히 마주한 윤희와 쥰의 모습과 "추신. 나도 네 꿈을 꿔."로 끝나는 윤희의 대사, 이렇게 두 장면이다.

 

 

  눈이 오는 배경이 영화의 분위기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영화에서 "눈"이 가장 많이 나오지만 "만월"이라는 단어도 나오고, 달이 자주 비치는데 오랜 세월 서로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 참고 오던 두 사람이 만나면서, 달이 꽉 찬 만월이 됨을 의미하는 듯했다. 둘의 재회로 비로소 해소된 그리움과 충만해진 두 사람의 마음을 만월로 표현한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을 숨기며 사는 것이 익숙해진 쥰과 가족들한테도 억압받으며 살아온 윤희가 서로 마주하며 잠시나마 억눌렸던 그리움, 감정들이 해소 됨을 만월로 의미 한 것이 아닐까.

 

 

  남은 인생을 벌이라 여기며 살아온 고독한 윤희의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암시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초반에 윤희의 딸 새봄이가 엄마는 뭐 때문에 사느냐, 왜 사느냐, 라고 물었을 때, 딸 새봄 때문에 산다고 했었다. 영화 초반의 윤희는 본인을 위해서 뭘 하고 싶어서 어떤 의지가 있어서 사는 게 아니라 그저 감내하며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쥰과의 재회 이후에 윤희는 본인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려는 시도를 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 퀴어영화 내지는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벽 안에 갇혀 억압되었을 존재들이 스스로 소리를 내고 갇혀 있던 벽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잔잔하게 흐르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은 묵직한 여운이 남는 영화이다. 추신, 이 세상에 억압받는 모든 존재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기를.